미파

벌건 손을 바지 위에 마구 비볐다. 구길 수도 없는 전단지를 애써 소중히 드느라 손을 주머니에 넣을 생각조차 못했다. 허공에 긴 팔을 쭉 뻗었다. 수십 명의 인파 사이에서 닿을 수 있는 건 두세 명뿐이었다. 차마 거절하지 못한 전단지를 받아들고는 십 미터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 구겨넣어 버리는 사람도 있었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가 서너 번씩 받아 가는 이상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 의주가 건넨 전단지를 모르는 체하고 지나갔던지라 그에게는 그조차 달가웠다.

대학로 A 극장
<옥상 위의 천사>
매주 금요일&일요일 1 PM 공연

아, 방금 옥상 위의 천사가 다시 한번 바닥을 향해 추락했다. 힘을 잃은 자의 팔다리처럼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종이를 허망한 얼굴로 응시하던 의주가 시선을 하늘 너머로 던졌다.나,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거겠지?

Angel on the Rooftop

엔젤 온 더 루프탑
변의주 X 왕이샹

분명한 것은, 모두의 처음이 남다르지는 않다는 점이다. 의주는 종종 옥탑방 플라스틱 의자 위에 앉아, 캡 모자를 눌러쓰고는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제본조차 하지 않은 맨큐의 경제학을 한쪽 팔에 짊어진 의주가 나머지 한 팔로 최선을 다해 손사래를 쳤다. 에이, 내가 어떻게 연극 동아리에 들어가.“아, 의주! 나 진짜 혼자 가기 무섭단 말이야. 같이 가자. 응? 너 잘생겨서 분명 가서 반야심경만 읽어도 합격할걸.”혼자 가기 무서워? 그럼 안 가면 될 일 아니야? 무서움을 나누면 반이 되는 게 아니라 두 배가 되는 거 아닐까, 류? 나쁜 생각이 목젖 끝을 강하게 건드려 왔지만 의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다만 모자를 고쳐 쓸 뿐이었다. 모자 챙 밑으로 보이는 둥근 눈이 난처함으로 휘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단호히 거절했을 때 류의 상심할 마음을 헤아렸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연극 동아리’ 다섯 글자에서 어떠한 이끌림을 느꼈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이제 와서 생각했다. 그에게 연극이란 학교 체험학습 시간에 두어 번 보러 갔던 공연이라는 감상 정도가 전부였다. 연기에 관심이 전무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모든 미디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사를 하나 꼽아 보라고 하면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명대사 정도가 됐다. 그러나 대학 단위의 연극 동아리에 입부 오디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키가 크고 얼굴이 반반한 배우가 입부하는 해에는 관객 수가 유의미하게 증가했으며, 동아리 회장의 실적은 곧 관객 수로 매겨졌기에 동아리방 철문 앞에서 십 분가량 문을 열지 말지 고민하며 캡 모자를 고쳐 쓰던 의주는 동아리 회장에게 팔뚝이 붙들려 들어가는 불상사를 당했다.그 문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평생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그만큼 동아리 일이 바빠 눈 감았다 뜨면 중간고사, 다시 감았다 뜨면 기말고사일 지경이라는 루머가 돌았지만 의주가 생각하기에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갓 입부한 쪼렙 부원들은 죄다 연기 파트에 처넣어졌다. 딱히 연출을 하고 싶어 입부했던 건 아니라 불만은 없었다. 그는 배역 나누기 용도의 허접한 오디션에서 사내 맞선 명대사를 읊고 서브 남자 주인공 ‘용철’이 되었다.그제서야 알았다. 권태로움을 벗어나 보지 못한 인간은 권태롭다는 감정조차 깨우치지 못한다는 것을.또한, 권태로운 일상을 파괴하는 방법은 권태의 근원지를 박차고 나오는 것뿐이라는 것을.의주는 최초로 살아 숨 쉬는 기분을 느꼈다. 재조합된 폐의 조직 틈새로 차가운 공기가 들어찼다 급하게 빠져나가는 감각. 이제야 온전한 삶을 사는 방법을 깨달은 듯한 놀라움이 온몸을 감쌌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인생 최초로 유의미한 회전을 시작했다. 공급사슬이고 계량경영이고 뭐고 의주는 이제 연기가 하고 싶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을 게 아니라, 무대 위에 올라서서 핀 조명을 만끽하며 남들에게 내가 아닌 나를 보여주는 일, 그것만이 의주가 살 수 있는 목적이 된 것 같았다.그러나 지금까지 차곡차곡 쌓아둔 모든 것을 버린 채 꿈을 좇기에 의주는 신중했고, 자신의 인생에 몹시도 다정했으므로 꼬박 이 년을 연극 동아리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못 했다. 즐거웠지만 동시에 지루했다. 관객은 지인, 그리고 지인의 지인, 지인의 지인의 지인. 오는 사람은 매번 익숙했고, 새로운 얼굴이 보이더라도 꼭 부원 아무개의 쥐어짜 낸 인맥이곤 했다. (주로 일회성 관객은 부원 누군가의 썸남이나 썸녀이곤 했다. 의주 또한 애매한 관계의 과 후배를 단 한 번 초대한 적이 있으나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했다.)의주는 권태를 타파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주어진 상황에 안주하는 멍청이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우물 너머의 세상을 향해 뛰어들어 보기로 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익사를 하든 불타 죽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엄마, 아빠, 누나, 나 배우 할래요. 딤섬을 씹던 아버지의 목에 새우 조각이 걸렸다. 한참을 컥컥거리던 그가 벌건 낯으로 물었다. 농담이지? 거기에 대고 의주가 단언했다. 안정만을 따라가는 삶은 나에게 무의미한 것 같아요. 그의 단호한 눈을 바라보던 그의 부모님이 일제히 한숨을 쉬었다. 그래, 언젠가는 네가 이런 짓을 저지를 줄 알았어. 너는 늘 해 보고 싶은 게 많았지. 펜싱, 기타, 공부… 그의 부모님은 걱정이 많았지만 의주가 무엇이 되든 행복하기만 하면 됐다고 생각했으므로 의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들이 허황된 꿈을 평생 좇으며 고통스러워하는 꼴은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정확히 2년을 휴학할 것을 제안했다. 그 사이에 아무것도 진전되지 않았을 시 다시 학교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다. 의주도 그들의 결정이 강요가 아닌 요청이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즈음 자취방 계약이 끝나 마음껏 연기 연습을 할 수 있는 옥탑방을 가지게 되었다. 어쩐지 지난주에 본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 속에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난간에 팔을 기대고는 넓은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시야 안에 들어온 거리는 쓰레기와 우중충한 담벼락으로 인해 결코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시작의 날이다.머뭇거리는 의주를 끌고 동아리 방으로 들어갔던 연극 동아리 회장의 추천으로 대학로에서 연극을 시작하게 됐다. 큰 키에 잔뜩 빠글거리는 머리를 풀어 헤친 회장은 부원들에게 소위 ‘미친 여자’라고 불리었지만 그만큼 연극에 미친 사람이었으므로 의주는 그가 싫지 않았다. 인지도가 있는 연극은 아니었으며, 조악한 퀄리티의 공연이었지만 의주는 꿈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디뎠다는 고양감에 차올랐다. 홍보 대행을 해 줄 곳도 마땅치 않아 배우들이 직접 전단지를 돌렸다. 하루 종일 추운 겨울에 손이 불어 터지도록 전단지를 돌리는데도 관객이 한 자릿수를 넘지 않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의주는 그 소수의 사람들만을 위해 연기했다. 목이 상해 목소리가 뒤집힐지라도 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반짝이는 조명 아래로 금발, 흑발, 갈색의 머리칼들이 비추어질 때, 관객들이 그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때 그는 분에 넘치게 행복했다.그날의 기억을 반찬 삼아 타오르는 태양을 직시한 채 연기 연습을 했다. 옥탑방 근처를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 화내고, 울고, 웃어도 의주를 신경 쓸 이가 없었다.의주를 신경 써 줄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공연이 끝나면 종종 단원들끼리의 뒤풀이 술자리가 벌어졌다. 주량이 제각각이었기에 누군가는 이미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사라진 지 오래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턱을 괸 채 지루함과 졸음을 참지 못하는 티를 냈다. 후자에 속한 의주가 ‘나는 꼭 성공해서 존나 예쁜 여자랑 만날 거다’라고 소리 지르며 깔깔거리는 단원을 멍하니 바라봤다. 쟤는 도대체 연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잡을 수도 없는 성취감 하나만 바라보고 이렇게 아등바등하는데. 모두가 그의 말에 동감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단원의 이야기에도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없었기에 외로워졌다. 그 당시에는 간간이 이어 오던 연애 사업도 끊겼을 시점이었으므로, 의주는 속절없이 쓸쓸해지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핸드폰 위젯 속의 디데이는 성실하게 줄어들었다.

D-365

일 년이 흘렀다. 외로움은 어느새 심장 구석에서부터 곰팡이처럼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갔다.문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큰 노크 소리를 들었다. 자다 깨 뒤집힌 목소리로 누구세요? 소리쳐도 묵묵부답이었다. 회식 자리 이후 심신이 지친 탓에 머리도 못 말린 채 잠이 들었던 것이 문제였는지 거울 속 의주의 머리카락은 금방이라도 승천할 듯 이리저리 뻗쳐 있었다.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방을 나섰다. 탐탁지 않은 사람일지도 모르니 잠금쇠를 걸어 놓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낡은 철문에서는 비명 소리가 났다. 좁은 시야 틈새로 겨울인데도 반소매 티셔츠를 걸친, 백발에 가까운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딸기 한 봉지를 내밀었다.“이사 왔어요.”그는 자신이 해롭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날카로운 눈을 반으로 접어 웃었다. 몇 달 전에 짐을 잔뜩 옮기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음의 주인공이었나 보다. 그런데 왜 이제서야 나를? 의주는 떨떠름하게, 그러나 구태여 티는 내지 않고 그 검은 봉지를 받아 들었다. 어쩐지 무언가를 들려 보내야만 할 것 같았지만 자취방 냉장고에 그럴 만한 무언가가 있을 리 없었으므로 그는 인사치레식의 냉장고 뒤지기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로 했다. 어차피 연기는 그의 주 종목이었으므로. 잠금쇠를 풀어 바닥에 있던 정체 모를 무언가로 문을 지탱해 놓은 채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순간, 남자가 거대한 손으로 의주의 얇은 팔목을 붙잡았다. 마주친 작은 눈동자가 번뜩여서, 의주는 본능적으로 몸을 잘게 떨었다. 그가 아차 싶었는지 다시 한번 그린 듯한 미소를 보여주었다.“번호 주세요.”앗, 나도 모르게 ‘왜요?’라고 물을 뻔했다. 그가 내뱉은 첫 문장에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두 번째 문장을 듣고서야 알았다. 이 남자가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이라는 것을. 의주가 그의 국적에 대해 짐작했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남자는 눈썹과 함께 고양이 같은 눈을 축 내려 가여운 얼굴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균치를 웃도는 사나운 얼굴이었음은 분명했다. 집주인이랑 소통 어려워요. 도와주세요. 그가 동굴처럼 낮은 목소리로 간청했다. 그것을 듣고 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계약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 때면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단어들도 오갈 테니까. 말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남자가 마지막 펀치를 날렸다. 사례할게요. 의주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도움을 청하는 외국인을 무시할 만큼의 차가운 성정도 아닐뿐더러, 그에게 돌아오는 것이 뭐라도 있을 테니 비효율적인 일은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근데 안 추우세요?”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꽂고 있던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의주를 올려다보았다. 전 지금 더워요. 농담은 아니었는지 정말로 그의 양 볼이 붉었다.정체불명의 그는 정말로 며칠 후에 연락을 해 왔다.

Nico안녕하세요. 도와주세요!

무슨 문자를 응급 문자 잘못 발송된 것처럼 보내냐… 핸드폰을 든 채 중얼거린 의주가 연기 연습을 잠시 멈추고는 계단 밑으로 내려갔다. 현관 앞에 금발의 남자와 집주인 아주머니가 마주 본 채 서 있었다. 손짓발짓 전부 활용하며 쩔쩔매는 여력이 분명하던 그는 의주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그의 팔에 자신의 손을 걸어 주욱 끌어당겼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의주는 저항 한번 못해 보고 남자의 옆에 서게 됐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이샹은 (집주인 아주머니는 그를 이샹이라고 불렀다) 2층에 살고 있었는데, 3층으로부터 물이 샌다고. 그런데 한국어에 서툰 외국인 신분으로는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가 힘들어 의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 의주 또한 가족을 떠나 홀로 사는 자취생의 마음을 알았으며, 실제로 옥탑방 이전에 거주했던 자취방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큰 골치를 앓았던 적이 있었으므로 솜사탕 같은 말투로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에 대해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자국을 떠나 한국까지 왔는데 물이 새다니… 불편하겠다. 무섭게만 보이던 그에게 측은지심이 생겼다.“감사합니다.”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인사했다. 체구가 좋았지만 의주보다 살짝 작은 신장의 그는 밝은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입을 꾹 다물더니 의주를 올려다보았다. 시간 있으면, 밥 먹고 가요. 집에 치킨 있어요. 그는 이내 재빠르게 덧붙였다. 먹다 남은 거 아니고 새거. 곧고 얇은 목을 긁적이던 의주가 길을 안내해 달라는 뜻으로 남자의 뒤로 몸을 붙였다.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집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러다가 갑자기 육성으로 헉, 소리를 내고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며 의주를 문 앞에 방치해 두었다. 문 너머로 부산스럽게 집을 뒤집는 소리가 났다. 문이 잘게 열리고 그 사이로 남자의 얼굴이 빼꼼, 삐져나왔다. 이제 들어와 주세요.그의 방은 꼭 그 같았다. 남자가 밥상을 차리는 동안 의주는 멀뚱히 서서 그의 집 안을 둘러보았다. 옷장의 범위를 넘어선 휘황찬란한 옷들과 벽면에 붙은 수십 개의 사진들이 각자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르겠다고, 의주는 생각했다. 치킨을 집어 먹는데도 그는 끊임없이 의주를 정신없게 만들었다. 의주, 거기 젓가락 좀 주세요. 후디에 묻었어요. 휴지 줄까요? 아니면 내가 닦아줄까요? 치킨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입에 들어있던 음식물을 으적으적 씹어 넘긴 의주가 물었다.

“근데, 제 이름 어떻게 아세요?”“아까 주인아주머니가 이름 말하는 거 들었어요.”“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그럼. Feel free to ask.”“저도 아까 이름 들었거든요. 이샹이라고. 그런데 왜 제 핸드폰에는 니코라고 저장했어요?”

박터지는 소리를 낸 이샹이 낮게 읊조렸다. 아, 그걸 말을 안 했구나. 환기한다고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이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먼저 물어놓은 주제에 머리카락으로부터 흩뿌려지는 별빛 같은 반짝임에만 집중할 뻔했으나 의주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제 영어 이름, Nicholas예요. 그런데 친구들은 니코라고 불러요. 너무 길다고 줄여 부르다가.”“혹시 천주교… 아니, 뭐라고 해야 하지? 가톨릭이에요?”“어떻게 알았지? 저는 아니고, 할아버지가 가톨릭이에요.”“이름이 세례명이잖아요. 니콜라스.”“의주도 성당 다녀요?”“아뇨, 그건 아닌데, 제가 사실 연극 배우거든요. 제 배역 이름이 니콜라스고, 웃기지만… 천사예요.”

이샹의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 그러다 환히 웃었다. 그렇구나, 의주는 역시 천사구나. 의주의 양 볼이 봉숭아꽃처럼 붉게 물들었다. 노릇한 색의 피부 위로 발그레한 색이 퍼져 나갔다. 미리 말하는데, 놀리지 마요! 이미 많이 놀림받고 있으니까! 그가 양 볼을 손으로 가렸다. 화끈함이 멎어들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이샹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아무런 말이나 건네기로 했다.

“… 근데, 니콜라스를 줄이면 니콜 아니에요?”“그렇게 부르고 싶어요?”“예?”“나를 니콜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이샹은 절대로 먼저 눈을 피하는 법이 없는 사람 같았다. 그는 삼백안의 눈동자로 의주의 대답을 종용했다. 고양이를 피하려다 고양이 소굴에 제 발로 들어온 꼴이었다. 천장 한 켠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빠진 채 그를 바라보던 의주가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그러자 이샹이 아주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가 벽을 타고 윗집으로 넘어가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그러면 그렇게 불러요. 나는 의주만의 니콜.”… 외국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런 말을 하나? 이샹의, 아니, 니콜의 국적조차 모르는 주제에 그런 생각을 했다.손에 쥔 종이 쪼가리를 약하게 문질렀다. 손바닥만 한 사이즈의 종이에는 구름 한 점 없이 퍼런 하늘이 인쇄돼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 전 벽면을 구경하던 의주의 곁에 바짝 붙으며 이샹이 물었다. 하나 가질래요? 그의 집 한쪽 벽에는 수십 개의 하늘이 유영하는 중이었는데, 이샹은 그에게 그의 하늘 중 하나를 선물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탁상 위에 올려진 몇 개의 카메라와 사진의 퀄리티를 보기로 아마추어일 리는 없을 듯해 물어보니 그가 사진과에 재학 중이라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는 이것저것을 찍은 사진들을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하고 있다며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의주는 사진에는 문외한이었지만, 그의 재촉으로 맞팔로우를 해 강제 염탐하게 된 그의 계정 피드에는 누가 봐도 전문가의 손길이 묻어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샹 본인의 사진이 더 많은 것 같기도… 팔로잉 163 팔로워 153 비공개 계정이 (팔로잉 열 개는 강아지 인플루언서 계정이다) 이샹의 수만 팔로워 속에 묻혀 들어갔다. 의주는 그의 계정을 삼십 분 동안 내려다보다가 그제야 손에 쥐어둔 사진을 현관문 앞에 붙여두었다. 어두운 방 안에 있어도 이제 내 눈 앞에는 하늘이 있다. 그게 뭐라고 위로가 됐다.

D-298둘은 2002년도에 태어난 동갑내기였으므로, 친해지는 데에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의주는 둘이 한 건물에 거주하지 않았다면 서로에게 말을 걸 일이 평생 없었을 것이라 장담했다. 패션 같은 사소한 것에서도 둘의 다른 점이 여실히 드러났고, 둘의 성향 또한 그랬다. 이샹은 틈만 나면 의주의 옥탑방 위로 올라왔다. 별말 없이 얌전한 고양이처럼 앉아 있을 때도 있었지만, 누워 쉬고 있는 의주를 건드는 일이 더 많았다. 쇼핑을 가자, 라멘을 먹으러 가자, 밤 산책 가자,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지치지도 않는지 끊임없이 같이 나갈 것을 요구했다. 열 번 중 다섯 번은 장단을 맞추어 주곤 했지만, 나머지 다섯 번은 체력의 한계로 차마 맞춰 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샹은 얕게 툴툴거릴 뿐 여전히 의주의 옆에 있었다. 의주 바보. 그가 의주의 머리통에 아주 약한 힘으로 딱밤을 놓았다. 의주는 여전히 시체처럼 누워 있는 채였다.그러나 이샹이 언제나 성가시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의주의 유일한 관객이 되었다. 이런저런 대본을 뽑아다가 무작정 연습할 때, 이샹은 대사를 알아듣지도 못하는 주제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에게는 5초 이상 한 자세로 앉아 있지 못하는 고질병이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의 시선만은 올곧게 의주를 향해 있었다. 이샹의 눈은 의주만을 촬영하는 카메라의 렌즈 같았고, 의주는 그것을 응시하며 연기했다. 이샹이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찰칵,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근데 그건 아니지… 이 개새끼야!!!!!!!!!”“어우 깜짝이야. 갑자기 소리를 질러. 개새끼가 뭐야?”

의주가 찌푸렸던 인상을 1초 만에 펼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미안, 놀랐어? 동그란 눈에 햇빛이 잔뜩 담겨 안광이 돌았다.

“욕이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썬옵어비치보다는 조금 괜찮은 말?”“아 그렇구나. 오케이 미안. 마저 해.”“웅. 야 이 개새끼야!!!!!!!!!!!”

평소에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 탓에 소리 지르는 연기를 했던 날에는 목이 곧잘 쉬곤 했다. 목을 가다듬는 의주의 곁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내던 이샹은 어느 순간부터 편의점에서 구매한 꿀물 한 병씩을 의주의 집에 가져다 놓기 시작했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었지만, 그것을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의주에게는 부담이었으므로 그의 집 냉장고에는 다 마시지도 못할 꿀물이 쌓여 갔다. 그래도 필요할 때 없는 것보다는 백 배 나은가. 냉장고 문을 열면 자연히 이샹이 떠오르게 됐다. 그렇다고 해도 꿀물값 정도는 약과였고, 그가 의주에게 허비하는 카메라 필름 값만 헉 소리가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았으므로, 부모님이 반찬을 보내 주시는 날에는 이샹을 집에 불러 같이 저녁을 먹었다. 혼자 먹다가 남길 거 둘이 먹으면 더 좋잖아.이샹은 과제에 활용하겠다는 핑계로 의주의 얼굴을 자주 찍어 갔다. 그러나 의주는 그 사진이 과제로 쓰일 일은 평생 없을 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눈치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모공 하나하나까지 확대해서 찍힌 우스운 표정의 사진을 대체 어느 미친 인간이 교수에게 보여주겠다며 설친단 말인가.

“이거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돼?”“니콜… 이건 괜찮은데, 이거는 못생기게 나왔잖아.”“뭐가 못생겼어? 귀엽기만 한데. 의주 미감이 진짜 없어. 그러면 배경 화면 해도 돼?”“이걸 대체 왜?”

그냥, 내가 찍은 것들 중에 가장 예뻐서. 말문이 막혔다. 그런 말을 하며 웃는데, 평소의 이샹이 던지던 시답잖은 농담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었다. 불길했다. 의주가 감히 컨트롤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저 먼바다로부터 해일의 형태가 되어 그를 덮쳐 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무섭게 생긴, 심지어 키는 180에 육박하는 거구의 남자가 인스타 스토리에는 의주를 태그해 비밀 여자 친구라도 된 것처럼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올려 대니 의주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의주는 이샹이 본래 누구에게나 이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난 지 몇 개월 되지 않았지만 이샹의 모든 걸 간파해 버렸다는 거만한 이야기가 아니다. 의주는 여전히 이샹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모든 의문점들은 ‘왜’에서 기인한다. 왜 굳이 대만으로부터 건너와 한국의 사진과에 입학했는지, 왜 자꾸 내 사진을 몰래 찍어 ‘뭘 해도 귀여운 주주’라는 코멘트를 달아 올려대는지, 왜 나의 우스운 얼굴을 핸드폰 배경 화면으로 걸어두는지. 의주는 정말 그 무엇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평소 인스타 스토리를 견주어 보자면, 그의 DM 창에 가득한 다른 친구들을 만날 때는 이런 간지러운 코멘트를 달아 올리는 법이 없었다. 친분 과시는커녕 자신의 아웃핏을 선보이는 데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이샹은 필름 카메라, 핸드폰, 심지어는 대포 카메라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의주의 얼굴을 찍어 댔다. 개중 웃긴 것이나 귀엽게 나온 사진들은 인화해 벽에 걸어두는 식이었다. 소중한 손길로 벽에 수많은 의주들을 고정하면서, 나중에 주주 유명한 배우 되면 백만 원에 팔아야지. 하며 가볍게 웃었다.

“… 농담이지?”“…”“… 농담이지…?”“…”“… 야아… 너…”

이샹이 푸하하 웃었다. 말도 안 돼. 그럴 리 없잖아. 의주는 백만 원이 아니야. 어떻게 너를 팔아넘길 수 있겠어. 어쩐지 오버하면서 웃는다 싶더라니, 이내 발 밑에서 쿵 소리가 났다. 협탁에 올려둔 그의 카메라가 곤두박질쳐져 있었다. 의주가 사색이 되어 카메라를 주워 들었다. 야, 너 조심 좀 해! 다행히 깨진 곳은 없는 것 같은데… 두 손으로 들기에도 무거운 그것을 이샹에게 넘겨주었다. 다급하게 버튼들을 몇 번 눌러 보던 이샹의 눈이 급격히 커지더니 불시에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큰 손으로 머리를 싸맨 채였다. 으아아… 좌절하는 소리가 스멀스멀 벽을 타고 올라왔다.

“왜 그래? 고장 났어?”“아니… 카메라는 괜찮아.”“근데 왜 그래?”“SD 카드가 고장 났어.”“뭐? 어떻게 해? 그 안에 과제 있어?”“아니, 이 안에…”“그 안에?”“의주 사진 있어. 어떻게 해?”“아, 난 또 뭐라고. 다행이네. 다시 찍으면 되잖아.”“그 말이 아니잖아…… 의주 진짜 바보야.”

완전 완전 바보야… 이샹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당황한 의주가 그 몸짓에 맞춰 몸을 옹송그렸다. 야, 울어? 우는 거 아니지? 미안해 내가… 내 사진 없어진 게 그렇게 아까워?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이샹이 쪼그려 앉은 그대로 눈을 치뜨며 의주를 올려다보았다. 사나운 눈꼬리 밑 검은 눈동자가 의주를 쏘아보았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어, 그래… 안 우네.”“근데 울고 싶은 마음이야.”“너무 슬퍼하지 마.”“안아줘.”“뭐?”“네가 안아줘야지.”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의주가 어정쩡한 폼으로 팔을 뻗었다. 이샹이 의주의 팔을 낚아채 제 등을 감싸도록 했다. 서지도 앉아 있지도 못한 채로 그를 안았다. 눈앞에 놓인 이샹의 금빛 머리칼이 가을의 밀밭처럼 목덜미를 감싸고 있었다. 타인과 몸을 붙이면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는 건 불가항력적인 일인 걸까? 의주는 심장이 뛰는 소리가 부디 이샹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기만을 바랐다. 혹여나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핑크색 하트 모양의 어떤 감정을 직시하기에는 의주가 삶에서 마주하고 있는 도전이 너무나 큰 상황이었다. 내게 주어진 혼란은 나의 꿈으로 충분하다. 눈을 꾹 감았다.

D-260어렴풋이 눈치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샹은 여전히 강의가 끝나면 의주의 옥탑방에 들이닥쳤고, 의주의 공연이 없는 날에는 자연히 그 또한 철문이 열리는 소음을 기다리게 됐다. 이샹은 늘 현관문 근처에 카메라가 든 가방을 척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화장실로 직행해 손을 벅벅 닦고 나왔다. 옥탑방으로 올라오는 경로에는 이샹의 집이 있었지만 그는 짐조차 가져다 두지 않은 채 곧바로 옥탑방 계단에 발을 디뎠다. 이샹이 수건으로 물기를 제대로 훔치지 않은 축축한 손 그대로 의주의 위에 올라탔다. 엎드려 핸드폰 화면을 스크롤 하던 의주가 바닥을 향해 무자비하게 눌렸다.

“니콜, 무거워어…”“주주. 네가 어제 갑자기 나한테 주말에 놀러 가자고 하는 거야.”“응? 내가 그랬어?”“끝까지 들어. 그래서 꿈인가? 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꿈이었어.”“그게 뭐야.”“안 미안해? 이게 다 의주가 나랑 놀아 주지 않아서 생긴 일인데. 나를 방치하고. 등한시하고.”

어제 친구들한테 방치랑 등한시라는 단어 배웠어? 너 한국인 다 됐다 야. 불리한 분위기를 쇄신해 보고자 영혼 없는 칭찬을 내뱉었다.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에 꽂힌 채였다. 의미 없이 핸드폰 화면을 빠르게 스크롤했다. 내용이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정보성 글들을 무작정 클릭했다. 그러는 동안 뒤통수에 이샹의 째려보는 눈빛이 따끔따끔 느껴졌다.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미안하라고 한 말 아니야.”“안 미안하냐며!”“그래서 할 말 없어?”“그럼 안 미안.”

됐어. 의주는 늘 이런 식이야. 어제도 나랑 밥 안 먹어 주고. 이샹이 의주의 위에서 내려와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불쌍한 척 쪼그려 눕는 동안 목에 걸려 있던 몇 개의 목걸이들이 저들끼리 부딪쳐 쩔그렁 소리를 냈다. 의주가 둥근 눈을 가늘게 뜨며 잠시 골몰했다.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이샹의 눈을 마주했다.“그러면, 이번 주말에 나 하는 연극 보러 올래?”이샹이 몸을 휙 돌려 의주의 팔을 붙들었다. 지금까지 지내며 본 이샹의 얼굴 중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그래도 돼?”그런 얼굴을 보니, 왜 지금까지 그를 초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는 맹세코 동아리 연극을 하던 시절 이후로 가족 제외 누군가를 연극에 초대해 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무대가 일자리였고, 그런 곳에 사사로운 영역의 사람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전부 핑계고, 어쩌면, 니콜라스에게 내가 연기하는 니콜라스를 보여주기 창피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의주의 얼굴 위에 덮여 있는 니콜라스는 어느새 실제 니콜라스를 많이 닮아 있었다. 옥탑방 플라스틱 의자 위에 멍하니 앉아 있는 거라든지, 강아지 같다는 묘사가 쓰여 있는 것이라든지. (모두가 이샹을 말 안 듣는 고양이처럼 여겼지만 의주는 그가 분명 강아지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관객을 향해 대사를 읊을 때마다 니콜라스를 떠올렸다. 금발에 제멋대로인 그 애를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현실의 니콜라스가 의주의 니콜라스에게 스며들었다. 이샹을 만난 후 역할 이해도가 높아졌다는 칭찬을 들었지만 그로 인해 이샹이 눈치채게 될까 두려웠다. 의주가 이샹을 따라 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 앞에서 그의 얼굴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나를 징그러워할까? 불안했다.하지만 의주는 알고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평생 가는 비밀은 없다.“나 그날 뭐 입고 가지? 아, 맞다. 나 어제 방치랑 등한시 말고 다른 한국말도 배웠어. 선언이랑 맹세.”나 무조건 의주 공연 보러 갈 것을 선언. 전날에 다리가 몽땅 부러진대도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공연장 갈 것을 맹세할게. 무신사 앱 뒤지며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고 있는 이샹을 바라보며 의주는 생각했다. 갈색의 복슬복슬한 머리칼 위로 천장 조명의 불빛이 스며들었다. 턱을 괴고 있던 팔을 쭉 펴 똑바로 누웠다.어쩌면 먼저 눈치채 주기를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금발의 이샹은 구석 자리에 앉아 있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작은 극장에 켜져 있는 조명이라고는 무대 위밖에 없었지만, 의주는 이샹을 단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중간중간 지루한 티를 내며 몸을 뒤척이는 관객들 사이에서 이샹은 가만히 거치된 카메라처럼 오직 의주만을 응시하고 있었으므로.갈색 곱슬머리의 니콜라스는 어느 날 옥상 위로 떨어진 천사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휴학 후 구직 활동조차 포기한 주인공 ‘김’을 지켜주기 위해 내려왔다며 뻔뻔히 집 한구석을 차지한 그는 사실 천국이 갑갑해 무작정 도망친 처지였다. 김은 그의 사연조차 모르는 인간인 주제에 천사를 안쓰러워하며 부러진 날개를 치료해 주려 하지만 니콜라스는 김을 답답해한다. 평생 같이 있으면 될 일인데, 너는 왜 나를 천국으로 돌려보내려 해?

“너는 바보야. 왜 이렇게 용기를 내지 못해?”“너는 나랑 다르니까! 너는 내가 아니니까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나는 네가 아니야!”“아무리 달라도 누구에게나 용기는 있어!”

누구에게나 용기는 있다는 말을 하면서, 의주는 어쩐지 연극 속 니콜라스가 김에게 내뱉는 대사가 이샹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 같다는 착각을 했다. 그가 있을 관객석을 흘끔 쳐다보았다. 이샹의 동공은 여전히 의주에게 고정돼 있었다. 황급히 눈을 돌렸다. 하마터면 대사를 절 뻔했다. 낭패였다.눈앞에 거대한 꽃다발이 들이밀어졌다. 얼떨결에 그것을 한 아름 받아 든 흰옷의 의주가 물었다.

“이게 뭐야?”“초대받은 건데, 빈 손으로 올 순 없잖아.”

이샹이 눈썹을 으쓱였다. 다른 단원들의 눈이 둘에게 쏠렸다. 같은 성별의 친구에게 핑크빛 장미를 선물 받는 남자라니, 흔치 않은 일이라는 걸 알기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는 초면의 남들 앞에 보인다고 나름 신경 쓴 건지 검은 자켓에 질질 끌리지 않는 바지를 입고 있었다. 부담스럽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섬세한 그가 귀엽다는 마음이 작은 오너먼트가 되어 심장 한 구석을 장식했다. 울렁이는 기분이 이상했다. 때마침 옷을 다 갈아입고 온 단원 박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 의주 친구?”“안녕하세요. 니콜라… 왕이샹입니다.”“이샹? 외국인이에요?”“대만 사람이에요.”“우와, 한국말 잘하네?”

감사합니다, 하며 이샹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의주의 뒤로 슬쩍 몸을 숨긴 이샹이 의주의 허리를 감싸 왔다. 억지로 꾸며낸 미소를 지으며 의주를 올려다보았다. 낯을 가리고 있나 보다. 의주의 주변인에게 이샹을 소개한 것은 난생처음 있는 일이라, 그의 이런 모습이 어색해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시간 괜찮으면 뒤풀이 같이 와요. 둘이 어디 가기로 했어?”“그건 아닌데… 너 괜찮아?”

싫으면 안 가도 돼. 의주가 이샹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으며 속삭였다. 이샹이 고개를 황급히 뒤로 물렸다.

“아니야, 갈게. 갈게요.”“그럼 나 빨리 옷 갈아입고 올게. 진짜 잠깐만 기다려.”

의주가 여태껏 입고 있던 흰옷을 끌어올리며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맞다. 꽃 고마워! 태양처럼 웃은 그가 손을 휘적였다. 이샹은 그의 뒷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홀로 생각했다. 방금 얼굴, 사진 찍어둘걸 그랬네.의주가 이샹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작게 나 있는 창문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미세한 달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옅은 알코올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단원들이 자꾸 술을 궤짝으로 퍼먹인다는 불평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좀체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의주가 반 인사불성이 되었다. 모르는 이에게 강권은 하지 않는다지만 마냥 거절할 수만은 없는 분위기였던지라 술을 아예 못하는 이샹 또한 몇 잔 넙죽넙죽 받아 마신 탓에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샹은 눈을 꿈뻑이며 졸린 티를 있는 대로 내는 의주를 질질 끌고 옥탑방 계단을 올랐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두길 다행이지. 힘쓰느라 자연스레 펌핑된 팔뚝을 두어 번 돌린 이샹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무 노래나 일단 틀어… 아무거나 신나는 걸로오…”“신나? 어? 너 지금 노래 부를 정신이 있어?”

의주가 붉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올라간 입꼬리가 더욱 말려들었다. 이샹은 괘씸한 마음을 덮어 둔 채 핸드폰을 들었다. 녹화 버튼을 눌러 그를 화면 안에 담기 시작했다.“니콜, 나는 언제나 네가 정말 부럽다.”이샹이 놀란 눈을 뜨고 둘의 얼굴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핸드폰을 내렸다.“너는 하고 싶은 건 무조건 해야 하는 애잖아. 두려움도 없고.”

“…”“항상 널 보면서 생각해. 나도 저렇게 되어야지. 쉽진 않더라도…”“…”“관객석에서 너밖에 안 보이더라, 오늘. 넌 어딜 가도 반짝이니까.”

아니야, 의주야. 나는 어쩌면 너보다 무서워하는 게 많을지도 몰라. 나는 목적지 없이 도망친 거고, 너는 꿈을 잡기 위해 달리고 있을 뿐이야. 그런데 이걸 한국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야 네가 나를 이해해 줄지 나는 판단할 수가 없어. 네 버팀목이 된 내가 사실은 별거 아닌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넌 날아갈 거야?핸드폰 카메라 렌즈 대신 이샹의 눈이 의주를 담았다. 한참을 입을 떼지 못하던 그가 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천천히, 그리고 더듬더듬 말을 잇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갖고 싶은 건 사진 속의 네가 아니라 움직이는 너 그 자체야.”“…”“왜냐하면, 내가 본 것 중에 네가 가장 빛나니까, 끊임없이 반짝이는 건 카메라에 다 담기지 못하니까, 그러니까…”“…”“너는 나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어.”

네가 연기하는 모습이 좋아. 네 배역 이름이 니콜라스인 것도 운명 같아. 연기하는 도중에 나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도 좋아. (… 그거 눈치챘어?) 네가 천사라서 좋아. 근데 바보라서 좋아. 나랑 안 놀아 주는 건 좀 싫어.

“온 세상 사람들은 널 좋아하게 될 거야. 널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지.”“…”“근데 널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될 거야.”“…”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던 이샹이 의주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이건 선언이고, 평생을 가도 변하지 않을 맹세야.”

뚝. 이샹의 집과는 달리 의주의 옥탑방에는 물이 새는 곳이 있을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추락하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 폐에 숨이 가득 들어찼다. 연극 동아리에서 첫 연기를 선보이던 당시의 기분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의주는 인간의 힘으로는 감히 떨쳐낼 수 없는 기운이 둘을 감싸고 있음을 감지했다.이샹이 부드럽게 의주의 어깨에 손을 대고는 그를 눕혔다. 방바닥에 의주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길어버린 앞머리가 불편했는지 찡긋대는 이샹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내어 넘겨주었다.

“싫으면 안 해.”안 싫어. 싫지 않아, 니콜라스. 의주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이샹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내일 기억하지 못할 거면 안 할 거야.”“기억할게.”“술 취했다고 핑계 대면 다시는 너 안 볼 거야.”“평생 잊지 않아.”“거짓말.”“선언할게.”

이 순간을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그제야 이샹이 젖은 입술을 조심스레 가져다 대었다. 예수의 발등에 키스하는 신자의 몸짓처럼, 이샹이 천천히 의주의 옆에 눕고는 그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둘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귓불에 닿았던 큰 손이 목으로, 허리로 내려갔다. 물속을 유영하는 두 마리의 금붕어처럼 끊임없이 뻐끔거렸다. 서로의 산소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내 의주가 고개를 급하게 떨어뜨리더니 이샹의 어깨 위로 얼굴을 처박았다. 두툼한 허리에 얇은 팔을 감고는 시뻘게진 귀로 도리질을 쳤다.

“… 싫어?”“아니.”“그런데 왜 그래?”

의주가 말없이 떨어뜨렸던 아랫도리를 붙여 왔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던 이샹이 함의를 깨닫고는 미친 듯이 기침을 시작했다. 부르튼 윗입술이 움찔거리더니 겨우 벌어졌다.

“부끄러워? 모르는 척할까?”“응.”“그래. 자자.”

의주가 여전히 이샹을 끌어안은 채로 그의 날개뼈를 어루만졌다. 날개를 찾는 듯한 손길로 집요하게 더듬었다.너는 내가 천사라고 했지만, 내 옥탑방에 떨어진 천사는 너야.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상황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지만, 품 속에 들어온 천사 하나만으로 의주는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지 괜찮아질 것임을 예감한다.

D-180휴학생 신분이었던 의주와는 다르게 이샹은 여전히 사진과를 재학 중인 학생이었으므로 시험 기간은 필연적으로 찾아왔다. 혼자 있는 게 편한 성향이었지만 의주는 굳이 이샹의 집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채 누워 있곤 했다. 엎드려 이어폰을 꽂은 채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날 치의 공부를 끝낸 이샹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그의 곁에 누웠다. 자연스럽게 이어폰 한쪽을 빼 들어 제 귀에 꽂아버리고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뭐 봐?”“이터널 선샤인.”“아 그, 우리 저번에 같이 보다가 네가 나를…”“야.”“오케이, 미안.”

의주는 아직 이런 거 부끄러워하는구나, 하고 웃었다. 입꼬리 옆에 주름진 입동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런 걸 입 밖으로 꺼내는 이상한 사람은 너밖에 없을걸. 생각했으나 일언반구 없이 재생 중이던 영화를 일시 정지했다.

“잘 보다가 왜 꺼?”“됐어. 옆에 너 있으면 집중 안 돼.”“… 아무래도 내가 너무 산만해서?”

의주가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이샹을 훅 돌아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와중에 양쪽 입꼬리는 귀엽게 올라가 있어서 꼭 유치원생 같았다.“그런 거 아닌 거 알면서 그런다, 너는 꼭……”의주가 이샹에게 꾸물꾸물 안겨들었다. 그의 목덜미에서 의주와 똑 닮은 향이 났다. 의주를 꾹 끌어안은 채 그의 고개 너머로 핸드폰 알림을 확인하던 이샹이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의주를 황급히 떼어냈다.

“아, 맞다. 주주. 내가 저번에 너 연기하는 거 찍은 영상 있잖아.”“응. 나 화내는 연기했던 거?”“그거 좋아요 오만 개 넘었던데.”“뭐? 그거 올렸었어?”“응. 다들 댓글로 연기 진짜 잘한대. 너 하는 연극 보러 가고 싶대. 그래서 고정 댓글로 업로드했지. 연극 이름.”“…… 고마워.”“이럴 땐 볼에 감사 뽀뽀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샹이 살 없는 볼을 툭툭 두드리며 눈감았다. 날카로운 눈이 내려앉았다. 씰룩거리는 한쪽 입꼬리를 바라보다가, 그 위에 입술을 찍었다. 뭐야? 볼 뽀뽀보다 더한 레벨로 고마워? 고마울 짓 많이 해야겠다. 누가 봐도 신난 낯으로 이샹이 의주에게 바짝 붙었다.

“있잖아. 주주야.”“으응?”“오해하지 말고 들어. 나 진짜 그냥 네 생각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으응.”“너는 연극 배우 말고 드라마 같은 거 나올 생각은 없는 거야?”

베개에 얼굴을 댄 채 누워 있던 의주가 큰 눈을 꿈뻑였다. 귀여운 잔머리가 머리꼭지 위를 살랑거렸다. 아무래도 대답이 출력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초기의 이샹이라면 왜 내 말을 무시하냐며 상처받은 티를 있는 대로 냈겠지만, 의주와 사귀고 난 이후에는 그가 대답을 생각하는 데에 긴 시간을 소요한다는 사실을 깨우쳤기에 그의 입이 열릴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줄 알게 되었다.

“그런 건 아닌데, 난 아직은 무대가 더 좋아.”“그래?”“내가 처음 연기를 시작한 게 무대 위잖아. 그래서 아직은 여길 벗어날 마음이 안 들어.”“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그런데 갑자기 이런 건 왜 물어봐?”“그냥. 네가 TV에 많이 나오는 배우가 되면… 내가 너를 찍을 날이 올지도 모르잖아. 일상이 아니라 일하면서. 직업으로.”“…”“맘 같아서는 평생 너만 찍고 싶어. 다른 사람은 찍을 의욕이 잘 안 들어. 근데 언젠가는 너를 스튜디오에서 찍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까 열심히 찍게 되더라.”“…”“그런데, 나 혼자 설… 설레…”“설레발?”“응. 설레발치고 있는 걸까 봐. 의주는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나만 그러고 싶은 걸지도 모르잖아.”

아니야, 니콜. 나도 너한테만 찍히고 싶어. 의주가 이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꾹 눌러 내리며 예의 그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샹에게는 부끄러울 때나 탐탁지 않을 때 입술을 안으로 말아물고는 의주를 흘겨보는 습관이 있었다. 의주는 사실 이제 이샹이 원할 만한 말이 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주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샹은 의주의 진심이라면 뭐든 기꺼워한다는 걸 의주도 알았다. 그렇기에 더욱 솔직해질 줄 알게 되었다.“너한테 찍히는 나만 진짜 내 모습 같아.”우씨… 원색적인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생각보다 즉각적인 반응에 의주가 흠칫 놀랐다.

“뭐, 뭐 왜? 나 뭐 실수했어?”“영상 그냥 삭제할까? 내 주주 우리 집에 두고 이대로 나만 보고 싶다.”

이샹의 솥뚜껑만 한 손바닥 안에 의주의 얼굴이 가두어졌다. 그 탓에 시야 양옆이 가려져서 다른 것 없이 오직 이샹만이 눈에 들어왔다. 의주가 눈을 질끈 감으며 웃었다. 너 이러면서 맨날 뭐가 애교가 없대. 너 그냥 애굣덩어리야. 이런 말 하면 완전 화내려나.

D-48겨울이 돌아왔다. 관객은 눈에 띄게 늘었지만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자연스레 조급해졌다. 마음의 여유가 줄어드니 이샹과 싸우는 일도 늘어났다. 너무 사랑해서 미워하게 되어 버린다는 말을 의주는 조금 통감했다. 자그마한 것에도 서운하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 줬으면 좋겠다는 순간들이 쌓여 가면서 둘은 전형적인 일 년 차 커플이 되어 갔다. 이샹은 의주와 다툴 때마다 지갑을 챙겨 집 밖을 나섰다. 이샹이 돌아오지 않는 시간 동안 의주는 집 안을 묵묵히 지켰다. 눈물이 삐질삐질 새어 나왔지만 애써 울지 않은 척한 날도 있었다. 태연한 얼굴로 돌아온 이샹이 의주를 위해 사 온 메론빵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달려와 손을 부여잡았다.

“너 울었어?”“안 울었어.”“코가 빨갛잖아. 눈도 빨갛고.”“안 울었어. 연기 연습했어.”“미안해. 근데 그냥 솔직히 말해 주면 안 돼? 나 너랑 서운한 거 만들기 싫어.”

이미 잔뜩 서운해져 있는데 이제 와서 서운한 거 만들기 싫다고 뻔뻔하게 다가오면 어쩌자는 거야? 말만 하면 뭐가 바뀌어? 의주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구태여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사랑하니까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런 것쯤은.무엇보다 그는 이샹 또한 의주만을 위해 많은 것들을 인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가령 활동량이 많은 그가 사람 많은 핫플레이스로 데이트를 가자고 청할 때마다 나중에 가자며 거절해 버리는 것, 골목길을 걸을 때 잡아오는 손을 모른 체 뿌리치는 것, 나도 모르게 이샹으로부터 멀어지고 마는 것. 의주는 그럴 때마다 이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확실한 것 하나는 그가 무척 서운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이샹을 사랑하지 않기에 감행한 짓들은 아니었다. 의주에게는 기질적으로 인간과의 거리가 필요했다. 또한 그것은 사랑하는 연인조차 예외는 아니다.그런데, 이샹.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나 오늘 대만 가.”“… 뭐라고?”“다음 주에 돌아올 것 같아.”“그게 다야?”“그게 다냐니?”“너 안 미안해 나한테?”“미안해. 갑자기 결정된 거야. 부모님이 생각보다 조금 빨리 들어오라고 하셔서.”

해외 출국을 당일에 통보하는 남자 친구가 이 세상에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의주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생각했다. 지금 상황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이샹은 태연한 얼굴을 한 채 짐을 다 싼 캐리어를 한 손에 쥐고 있었다. 평소에는 짐 좀 챙기라고 해도 더럽게 말 안 듣더니, 이럴 때만 빠르지. 명치에서부터 화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증거로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왜 그렇게 갑자기 가야 하는 건데? 이유라도 알자.”“…… 그냥. 가족 모임 같은 거야.”

뻔히 알았다. 이샹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말이 목 끝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감내하는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므로.따라서 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샹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무작정 타파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너 변했어.”“뭐?”“너는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무슨 말이야? 그게 갑자기 왜 나와? 내가 왜 네가 아니어도 돼?”

이샹이 눈을 치뜨고 의주를 바라보았다. 표정관리를 하려다가 만 얼굴로 올려다보는 것이 꼭 울기 직전의 사람 같았다. 그의 꾹 닫힌 입술이 일렁거렸다.

“맨날 싸우면 친구랑 쇼핑한다고 집 밖으로 불쑥 나가 버리고! 나는 너 언제 올지, 오기는 하는 건지, 잠깐 나갔다가 엇갈리면 어쩌나 마음 졸이면서 이 안에 갇혀 있는데!”“…”“그러니까 너는…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

이샹의 시선이 느리게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의 흉통이 느린 속도로, 그러나 아주 큰 보폭으로 오르내렸다.

“의주야, 나는 네가 화나면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 너 진짜 화나면 내 말도 안 받아 주잖아.”“…”“그리고, 정말 가족 사정으로 돌아가는 거야. 거짓말 아니야. 그치만 그걸 의주 너한테 말해 주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랬어. 정확히는 너한테 내 상처를 보여줄 용기가 안 나.”“…”“오해하게 만들었다면 미안. 근데…”“…”“나라고 네가 아니어도 되는 건 아니야.”

이샹이 캐리어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의주가 이샹의 팔뚝을 쥐려 하자 그가 살짝 몸을 피했다. 하지 마. 얼굴 보면 나 못 갈 것 같아. 미안. 한국 오면 연락할게. 공항까지 데려다주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 했다. 끓어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왜 항상 돌려 말해? 그냥 솔직하게 말해 주면 안 돼? 별말 없이 사라지지 말고, 말없이 배려하지 말고, 그냥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해 주면 안 돼? 눈앞에서 현관문이 닫혔다. 이샹이 선물했던 하늘 사진은 여전히 그곳에 멀쩡히 붙어 의주를 한껏 약 올렸다. 이샹이 캐리어를 질질 끌고 내려가는 소음이 문 너머로 울려 퍼졌다. 의주가 힘없이 현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연락이 오지 않은 지 오 일째. 지하철 좌석에 우두커니 앉아 이샹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스크롤 하며 상념에 잠겼다. 평소의 이샹이었더라면 대만을 배경으로 한 사진들을 잔뜩 업로드해 두었을 텐데, 그에게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몇 개월 전의 사진 속 이샹은 여전히 해맑게 웃고 있었다. 요란한 옷을 입고 괴상한 구도에 멋진 포즈를 취하는 사진들 사이에서, 단정한 차림으로 꽃을 든 의주의 곁에 선, 이샹 같지 않은 이샹의 사진을 의주는 십 분 동안 바라보았다. 두 번 다시는 잊을 수 없는 그날. 이샹이 처음으로 의주의 연극을 보러 왔던 날의 사진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끄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워만 한다고 변하는 것은 없는데, 한국 오면 연락하겠다는 그 말이 먼저 연락하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다가와서 섣불리 말을 걸기가 힘들었다. 강남역에 정차한 지하철 스크린도어가 열리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퇴근길의 여파인지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들렸다. 열차 안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들어찼다. 시끄러운 지하철의 소음 사이에서 희미한 메시지 알림 소리를 들었다.니콜 😘
잠깐 전화 돼?그 순간, 의주가 사람들 밭 사이에서 벌떡 일어났다. 흐르는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역류해 지하철 밖으로 빠져나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사람들이 그를 흘겨보았으나, 민폐 짓이라는 걸 정말 잘 알고 있었으나, 그런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 이샹과 통화할 수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으며, 무엇보다 혹시라도 이미 한국에 도착한 것이라면 당장 그를 만나러 가야 했으니까. 얕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보이스톡 버튼을 눌렀다. 이샹 또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통화 연결음은 오래 가지 않고 끊겼다.“여보세요?”상대편에서는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니콜? 안 들려?”-… 들려.“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주주.“응?”-내 방 책상 위에 짐이 있을 텐데, 잘 있나 확인해 줘.“뭐?”-중요한 거야. 미안해. 며칠 안에 돌아갈게.

할 말만 짧게 내뱉고 끊겨버린 전화에 그제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어쩐지 허탈해졌다. 그러나 의주는 바로 친구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그렇게 중요한 게 뭔지 보기나 하자. 나랑 화해하는 것보다 소중한 게 대체 뭔지 구경이나 좀 하자고. 잔뜩 오기가 생겼다. 계단을 올라 이샹의 자취방 앞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는 1004. 천사 의주를 위해 바꿨다며 실실거리는 것에다 대고 비밀번호를 그리 쉬운 걸로 하면 어떡하냐며 핀잔을 줬던 기억이 났다.이샹의 책상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먼지 하나 없는 책상 위에는 엘자 파일 하나가 고이 놓여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물건의 존재만 확인하고 돌아갔을 텐데, 괜히 심통이 난 의주는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런 걸 알아봤자 인생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테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샹을 만난 후 이유 없이 저지르는 행동들이 늘어갔다. 따라서 파일을 탈탈 털어 책상 위에 내용물을 온통 쏟아버렸다.“어라?”의주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책상 위를 더듬었다. 나풀나풀 떨어진 티켓 여러 장과 전단지들을 집어 들었다.

이샹과 안면을 트기도 전의 날짜가 분명한 공연 티켓이 파일 안에 소중히 담겨 있었다. 옥탑방 문 너머로 딸기가 든 봉지를 받았던 것은 한겨울이었는데, 이샹이 보관하고 있는 티켓의 날짜는 가을이었다. 심지어 한 장도 아닌 여러 장의 티켓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려왔다. 의주조차 잊은 과거의 지난날들을 이샹은 집 한구석에 보물처럼 보관하고 있었다. 아무 의미 없었을 종이 여러 장에 사랑이 스며들어 있었다.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라지만 의주는 그것을 똑똑히 목격했다.사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고 위하는 너를 이제야 알았어.너는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구나.의주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빠른 손길로 이샹에게 메시지 한 통을 남겼다. 그와 동시에 인스타그램 DM 알림이 화면 상단에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할 말이 있어. 중요한 거야.][안녕하세요, A 엔터테인먼트입니다. 변의주 님의 연기가 인상적이어서 캐스팅을 진행하…]“뭐야?”아무도 없었으니 그 누구도 듣지 못할 게 뻔한 리액션을 허공에다 내뱉었다. A 엔터테인먼트는 연예계에서도 입지가 높은 소속사 중 하나였다. DM 캐스팅이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라는 것을 알음알음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본인에게 닥친 일이 되니 당황스러웠다. 사기인가? 싶어 이리저리 눌러 봐도 공식 계정이 맞았다. 얼떨떨했다. 그러나 A 엔터테인먼트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 위주의 배우를 길러내는 기업이었고, 의주는 분명 무대를 갈망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거대한 망설임이 그의 발목을 잡아 왔다. 그러나 나만을 찍고 싶다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동시에 결심했다. 만나라도 보자. 만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니잖아.약속을 잡고 회사로 찾아오게 된 날까지 여전히 이샹은 메시지를 읽고 답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웃기는 소리지만 니콜이 아침에 내 옆에 누워 있었다면 안심이라도 됐을 텐데. 물론 일어나지도 않을 시간이었지만. 의주가 얇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담당자를 멍하니 기다렸다. 그 짧은 순간에도 이샹의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변의주 씨?”“아, 안녕하세요. 변의주입니다.”

이야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연극에 대한 열정을 밝혔더니 그는 영화나 드라마 배우가 뛰는 현장도 연극 못지않게 생동감 넘친다는 이야기로 의주를 설득하려 했다. 의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납득은 되지 않지만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리액션부터 내뱉는 성정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제 연기… 어떻게 발견하셨어요?”“아, 의주 씨 연기요. 친구 중에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분 계시죠?”

의주가 단번에 이샹을 떠올렸다. 고개를 끄덕이자 눈 앞의 그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인스타그램 영상으로 연기하는 모습을 봤는데, 연극까지 보러 갔더니 페이스와 톤이 좋아서 바로 캐스팅하게 되었다고. 그러니까 의주 씨가 우리와 꼭 함께해 줬으면 한다고. 서로에게 좋은 기회가 될 것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이샹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의주는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이샹이 만들어 낸 운명에 대해 생각했다.혹시라도 TV에 나오는 유명한 배우가 된다면, 이샹이 지금처럼 대만으로 훌쩍 떠나 버려도 내가 조금이라도 보고 싶어질 때 쉽게 돌아올 수 있는 문이 되어 주지 않을까 싶었다.동시에 하늘을 떠올렸다. 이샹이 선물한 사진 안에 담긴 광활한 하늘을.의주가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담당자의 눈 위로 내리꽂았다. 이제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네, 해 볼게요.”

D-400내 머리 위에는 천사가 산다.한국으로 이사하던 날, 무감한 얼굴로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이샹은 날개 없는 천사를 마주했다. 옥상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그는 혼잣말을 하는 듯 보였는데, 눈을 찌푸리고 자세히 쳐다보고서 그제야 그가 미친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넘실거리는 햇살 너머의 허공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마구 소리치는 그가 이샹에게는 꼭 신의 사자 같았다. 어느 날 대학로를 걷다가 천사를 다시 한번 맞닥뜨렸다. 운명 같았다. 지금의 의주가 들으면 마구 웃어댈 이야기겠지만. 그는 얇은 니트를 걸치고서는 도로 중간에 서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이샹은 그가 맞는지 확인해 본다는 핑계로 그가 건네는 전단지를 두 번 세 번 받아 갔다. 여러 번 오가는 와중에도 그는 변함없이 웃고 있었다. 예쁜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채로 나긋하게 말을 걸어왔다. 6시 공연 꼭 와 주세요. 이샹은 그 전단지를 엘자 파일 안에 소중히 담아두었다.처음에는 캐스팅 스케줄도 모른 채로 극장에 찾아갔다 정작 의주가 출연하지 않아 멍하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어를 한 귀로 흘리고는 돌아왔다. 며칠 후에 다시 한번 찾아갔을 땐, 니콜라스의 이름을 한 의주가 천사의 행색을 한 채 등장했다. 그의 얼굴에 내 이름이 달라붙어 있었다.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너는 바보야. 왜 이렇게 용기를 내지 못해?”그 대사 한 줄에, 이샹은 용기가 없어 무작정 타국으로 도망친 지난날의 자신을 떠올렸다.몇 년 전 겨울, 미케일라가 죽었다.죽음에는 별 이유가 없다. 미케일라를 죽이기로 결심한 이는 그와 일면식조차 없는 남이었다. 그래서 더욱 절망스러웠다. 천사의 이름을 한 동생은 날갯죽지에 칼자국을 남긴 채로 쓰러졌다. 쓰러진 미케일라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샹이었다. 적막이 흐르는 집 안에는 둘이었어야 할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옅게 꿈틀거리는 손가락 끝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내가 조금만 일찍 들어왔다면. 내가 그날 나가지 않았다면. 차라리 미케일라 대신 내가 죽었더라면.시간은 지나고, 추억은 스러진다. 그러나 두려움은 심장 속에 그대로 남아 부패한다. 동생을 죽인 이가 멀쩡히 숨 쉬고 있는 대만의 하늘을 찍고 싶지가 않아졌다. 이곳에 남아 있을 용기가 없었다. 이대로면 카메라를 쥔 채로 가라앉아 익사해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무작정 한국으로 떠나왔다.미케일라. 하늘은 따뜻해? 부디 그랬으면 좋겠는데.어느새 미케일라의 기일이다. 검은 양복을 입은 이샹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일 년 만에 마주하는 대만의 하늘이다. 귓가에 성스러운 찬송가가 흐른다. 따라서 이샹은 자연스레 그의 천사를 떠올리고 만다. 의주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오늘도 코를 빨갛게 물들인 채로 울고 있을까?그러나 마냥 솔직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이샹은 의주에게 미케일라에 대한 묵은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슬픔은 나눠 봤자 두 배가 될 뿐이다. 더군다나 의주는 이샹의 굳은 심지를 동경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샹은 그의 변하지 않는,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었다.사실은,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이샹에게는 자잘한 투정은 쉽게 늘어놓는 주제에 거대한 고민은 전혀 털어놓지 않는 나쁜 습관이 있었다. 따라서 이샹은 증명해야만 했다. 말하지 못할 많은 것들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 그대로라고. 네가 아는 나보다 훨씬 이전 시간선의 니콜라스가 무대 위의 너라는 니콜라스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메시지를 전송했다.[잠깐 전화 돼?]

D-42그새 며칠이 흘렀다.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부모님도, 누나도 네가 기어코 해내는구나, 하고 웃으며 의주를 반겨 주었다. 의주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여전히 돌아와야 할 누군가에 대해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연락은 여전히 오지 않았지만 곧 크리스마스였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꼭 같이 눈을 맞자고 했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래도 내가 말이 너무 심했나 봐. 그래서 영영 돌아오지 않으려나 봐. 하늘에서 하얀 눈이 쏟아져 내려왔다.그러나 오 초 후, 의주는 하늘이 배설하는 쓰레기 같았던 눈이 곧 신이 내린 축복처럼 느껴지는 과정을 체감하게 된다.저 멀리 펑펑 내리는 눈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사람이 아른거렸다.

“니콜?”“빨리 와. 추워.”

가방을 고쳐 든 의주가 전력 질주해 이샹의 앞에 섰다. 추워서인지 한층 하얘진 그가 겉옷을 여민 채 자취방 건물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왜 여기 있어? 들어가 있지 않고. 안 추워?”“그냥. 눈 오길래. 의주 오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해. 내가 일으켜 줘야지.”

의주가 아주 소중한 스노우볼을 쥐는 듯한 손길로 이샹의 양 볼을 감쌌다. 어떻게 해. 볼이 너무 차가워. 핫팩이라도 들고나올걸. 의주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일렁이는 눈을 하고는 이샹의 허리를 푹 껴안았다. 이샹이 자연스럽게 의주의 어깨를 쥐었다. 한 손으로는 복슬복슬한 뒷머리를 살살 쓸어 주었다.

“중요한 할 말 들으려고 나 비행기 타고 빨리 날아왔어.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연락은 못 했어.”“원래는 할 말이 한 개 있었는데, 두 개로 늘어났어.”“하나는 나쁜 거고 하나는 좋은 거야?”“아니, 둘 다 좋은 거야.”“그러면 주주가 생각하기에 덜 좋은 것부터 말해 줘.”“나 A 엔터테인먼트랑 계약했어.”“뭐?”

이샹이 의주의 어깨를 쥐어뜯었다. 동그래진 눈으로 의주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광대가 봉긋하게 솟았다. 오늘 맛있는 거 먹어야겠네! 의주 축하해! 그러더니 이내 웃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런데… 너 분명 무대에서 공연하는 게 더 좋다고 말하지 않았어?”“네가 없는 동안 생각했어. 나는 네가 나를 잃더라도 언제든 나를 찾아올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야. 길을 헤매더라도 내 얼굴을 이정표 삼아 돌아올 수 있게 할 거야.”“…”“그게 내 승부욕이고, 내 새로운 목표야.”“…”“요즘 생각하는 건데, 너랑 있을 때 자꾸 나도 몰랐던 내 본모습이 나오는 것 같아.”“그러면… 두 번째 좋은 소식은 뭔데?”“사랑해.”“어?”“그 말을 해 주고 싶었어.”“야……”“그러니까 앞으로는 나 두고 멀리 가지 마. 나 무서웠단 말이야. 혼자 있는 거 싫어…….”

응, 알았어. 미안해 주주. 이샹이 의주의 머리를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오는 훌쩍거리는 소리에 등을 잔잔히 토닥여 주었다. 여전히 공유할 수 없는 사정들은 많았지만, 평생 말할 수 없는 비밀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샹이 의주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아니다.

“일 년에 한 번씩은 대만에 가야 해. 일주일이 될 수도 있고, 더 길어질지도 몰라.”“응.”“확실한 건, 네 옆으로 돌아올 거라는 사실이야.”

자랑스럽네, 내 주주. 이샹이 활짝 웃었다. 사랑하는 연인이 확신을 준다는 것은 이다지도 행복한 일이구나. 생각했다.계약이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이 년 만에 거둔 성과가 단기적인 행운일지, 장기적인 행복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목표가 생긴 이상 의주는 무너지지 않는다.목표 일 번. 니콜이랑 오래오래 사랑하기. 목표 이 번. 니콜이랑 화보 작업하기.눈 내리는 날에 천사가 다시 찾아왔다. 상처투성이에 완벽하지 않은 나만의 천사. 의주는 그의 천사에게 아주 천천히 속삭여 줄 것이다. 너는 완벽하지 않기에 아름답다고. 이 세상에는 불완전한 천사들도 존재할 수 있다고. 따라서 그라는 종교에 평생을 바치게 될지라도 전혀 아쉽지 않다. 어라, 이건 이단인가? 그러나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제는 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눈 더미에도 두렵지 않다.“의주, 코 빨개졌어. 루돌프 같아.”의주는 이제 이런 실없는 농담들이 의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한 애교라는 것을 안다. 남들은 무서워하는 작은 눈동자도 그에게는 그저 사랑스럽다.그러니까 우리 꼭 오래 보자, 니콜. 이건 하늘을 향한 나의 선언이자 맹세야.

Postscript“시작한다!”니콜라스가 소파 위에 다리를 모아 앉았다. 의주가 그의 옆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의주는 이 상황이 그닥 기껍지 않았다. 차라리 피해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주주 첫 키스신인데, 이건 본방사수 해야지.”그걸 네가 왜 봐 제발… 한 가지 변명을 해두자면, 의주는 키스신이 방영된다는 사실을 이샹에게 알린 적이 없다. 방송이 되는 날 이샹이 맛있어했던 딸기 디저트 가게로 끌고 가 그날 회차를 아예 못 보게 하려는 계략까지 짜 뒀었다. 예약 직전까지 간 순간, 이샹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어쩐지 받고 싶지가 않더라니. 스피커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청천벽력 같았다. 주주 키스신 찍었다며? 빙글빙글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그러는 것이 영 질투를 숨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TV 화면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는 꼴이 미웠다.

“옆에 진짜 내가 있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봐?”“일 호 팬의 모니터링이야. 말 걸지 마.”

이샹이 의주의 무릎뼈 위를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그것은 주주 바보라는 글자가 되기도 했고, 하트가 되기도 했으며, 의미 없는 낙서 같은 무언가가 되기도 했다. 태평한 그의 옆에서 의주는 점점 불안해졌다. 내 남자 친구랑 같이 내가 다른 사람과 키스한 걸 봐야 한다고? 적어도 의주에게는 그런 취미가 없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드라마를 시작하기 전에 이샹을 앉혀 두고 열심히 설명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미리 말할게. 장르 특성상 스킨십이나 키스신이 있을 수도 있어. 잡힌 손에 힘을 주어 당기며 이샹이 웃었다. 되게 진지하게 말하네. 귀여워.의주와 상대 배역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극 중 분위기는 클라이맥스로 다다르고 있었다. 이샹도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것인지 턱에 손까지 댄 채로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에잇, 모르겠다. 화면 한 번, 이샹의 옆얼굴을 한 번씩 번갈아 보던 의주가 한 손으로 이샹의 눈을 가렸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그의 티셔츠 목 부분을 쥐고는 훅 잡아당겼다. 클라이언트의 스케줄을 맞추느라 반복되는 밤샘 촬영에 저하되는 체력을 느꼈는지 최근 운동을 시작했던 탓에 의주의 힘보다 이샹의 힘이 우세했으나, (사실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도 이샹의 체력이 남다르기는 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손쓸 틈도 없이 질질 끌려왔다. 둘의 입술이 닿았다. 이샹이 어푸푸거리며 눈을 가린 손을 풀어 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의주는 위에서 누르고 있었고, 이샹은 밑에서 버둥거리고 있었으므로 포지션에서 의주가 절대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 싹싹 빌었다. 니콜, 미안해. 입 한 번만 벌려 줘. 진짜 미안해. 간절한 마음이 통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몸이 동한 건지 이샹이 의주를 사르르 끌어안았다. 통통한 윗입술이 벌어졌다. 의주는 익숙하게 그것을 가르고 들어갔다. 물컹한 혀가 입 안을 훑어 오는 감각이 선연했다. 이샹의 손이 의주의 허리를 지나서 엉덩이까지 타고 내려갔다. 몸을 흠칫 떤 의주가 이샹에게 더욱 가까이 붙는 순간, 이샹이 그 큰 손으로 의주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놀란 의주가 아야! 하며 허리를 바짝 세워 일어났다. 의주의 한 쪽 눈이 귀엽게 찌푸려져 있었다. 이샹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갑자기 왜 이래?”의주가 이샹의 허리 위에 올라탄 채로 옆을 돌아보았다. 문제의 장면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다. 축축한 입술을 손등으로 훑었다. 아아… 애타는 소리를 내며 이샹이 고개를 꺾었다. 주주 완전 짜증.

“왜, 뭐. 뭐가 또 짜증 나 또. 맨날 짜증 난대.”“보고 싶었는데…”“너 지금 보고 있잖아. 실물이랑 하고 있잖아.”“나는 주주의 키스하는 모습 평생 볼 수 없잖아. 그래서 궁금했어. 의주는 맨날 눈 뜨면 막 뭐라 하고.”“키스하면서 눈 뜨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어!”“여기 있어! 난 그러고 싶어! 의주의 모든 모습 알고 싶단 말이야! 포토그래퍼의 숙명이야.”

의주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 했다. 말려 올라간 윗도리를 끌어 내리며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딱 오 분 줄게. 오늘은 눈 떠도 돼.”“진짜?”“대신 드라마 오늘 편은 보지 말기로 해.”“알았어.”“진짜 약속했다 너. 안 보는 거다.”“알았다니까. 나만 믿어.”

이렇게까지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라 당황했다. 작은 눈동자에 안광이 잔뜩 맺혔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해 줄 걸 싶기도 했다. 이샹의 큰 손이 의주의 볼을 감싸 왔다. 앞선 키스와는 다르게 입술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몇 년이 흘렀어도 의주는 여전히 눈을 질끈 감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이샹이 입술을 맞댄 채로 부스스 미소 지었다.언제나 이렇게 여전하길. 변하더라도 늘 함께 있길.약속된 오 분이 훌쩍 지나가고 있었다. 의주도, 이샹도 그걸 뻔히 알았지만 둘은 여전히 엉켜 있었다. TV에서 엔딩 OST 노래가 흘러나왔다. 수많은 다음 편들이 몸을 웅크린 채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적어도 오늘은 해피 엔딩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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